
출애굽기 34:6에서 하나님은 스스로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는 분”이라 소개하십니다. 구약의 긍휼(라함)은 어머니의 자궁처럼 깊은 사랑을 뜻하며, 시편 103:13은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같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라보신다고 합니다.
예수님 또한 고통받는 무리를 보시며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습니다. 병자와 죄인, 그리고 무리를 향한 그분의 마음은 판단이 아니라 연민이었습니다. 이 하나님의 마음이 우리의 인격이 될 때, 우리는 판단하고 정죄하는 신앙에서 함께 아파하는 인격으로 변화됩니다.
긍휼은 말보다 먼저 반응합니다. 입술보다 심장이 먼저 움직입니다. 가르치고 지적하기 전에 회개 하고, 이끌기 전에 함께 우는 것, 그것이 바로 긍휼입니다.
우리의 교회가 긍휼의 언어와 문화로 채워지길 바랍니다. 작은 훈련을 시작해 봅시다:
1) “긍휼 일기”를 써 보십시오: 오늘 받은 긍휼, 흘려보낸 긍휼을 적어 보세요.
2) “침묵과 기다림”의 연습, 다시 말해, “말하기 전 3초 멈추기”를 훈련해 보십시요. 특히 상대방에 대해 화가 나고, 부정적인 말이 튀어나오려 할 때, 그 멈춤 3초는 우리의 혀를 제어해줄 것입니다.
한 마디 말이 교회의 공기를 바꾸고 나 자신을 바꿉니다. 긍휼의 말이 자주 오가는 교회는, 긍휼의 하나님이 머무시는 자리입니다. 긍휼이 우리의 태도, 언어, 교회 문화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는 말씀처럼, 거룩은 하나님 백성의 정체성이며 삶의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함이란 정확히 무엇일까요? 원어를 보면, 히브리어 ‘카도쉬’, 헬라어 ‘하기오스’ 할 것 없이 기본 뜻은, “구별된, 따로 떼어 놓은”이라는 의미입니다. 쉽게 말해 거룩 = 구별입니다.
거룩은 따로 사는 삶이 아닌, 다르게 사는 삶입니다. 예수님은 죄인들과 함께 하셨고, 죄인들과 어울리셨지만 죄에 물들지 않으셨습니다. 거룩은 세상과 단절이 아니라, 세상 한가운데서 구별된 성품과 행실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 속의 교회입니다. 우리가 세상 속에 들어가 있지만, 세상 사람들과 똑같이 부패하고 타락한 모습을 보인다면 아무 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너희는 하나님의 편지”라고 한 말씀처럼 (고후 3:3), 세상은 우리의 거룩한 삶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읽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과 따로 떨어져 살도록 부름받은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거룩하게 살도록 부름받았습니다.
거룩은 우리의 매일 매일, 아주 작은 순간들의 선택 속에서 이뤄 집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휴대폰을 들어 SNS나 뉴스를 보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기도로 말을 거는 것—이것이 작은 거룩의 실천입니다. 대화 중에 모두가 가십이나 남 험담으로 즐거워할 때 그 자리를 슬쩍 피하거나 긍정적인 화제로 바꾸는 것—그것이 작은 거룩의 선택입니다. 심지어 집에서 혼자 있을 때에도 보는 것, 듣는 것,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분별하여 깨끗함을 유지하는 삶, 이것이 거룩입니다. 거룩한 삶은 수많은 ‘작은 구별’들의 합으로 이뤄집니다. 남들이 보기에 대단해 보이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의식하여 하는 그 작은 선택들이, 모여 거룩한 성품을 형성합니다.
이번 한 주, 이런 “작은 거룩”의 훈련을 함께 실천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아침 첫 말을 기도로 시작하기, 대화 중 험담 피하고 축복의 말 건네기, 하나님 앞에서 ‘한 가지’ 끊어낼 것 결단하기…등등 올 한 해 하나님을 닮은 거룩한 성품으로 빚어져 가는 우리 퀸감 공동체 되시길 빕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셨지만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입으셨고, 사람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셨습니다. 주님은 지고한 신의 권리를 갖고 계셨지만, 인정 받을 권리, 이 땅에 자기 왕국을 세울 권리, 모든 권리를 포기하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증명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위해 당신의 신성을 조금도 사용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참되심은 전능함보다 ‘낮아짐’이라는 겸손의 성품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겸손이 오늘 우리가 품어야 할 자세입니다. ‘너희는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빌립보서 2장의 이 말씀은 당시 명예와 지위를 중요시하던 빌립보 교회에 바울이 보낸 도전이었습니다. 우리는 대접 받길 원합니다. 남들이 나를 알아 주길 원하고, 남들이 나를 세워주길 원합니다. 심지어는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앞두고, ‘누가 크냐’ 자리 다툼을 하던 것이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와 반대의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바로 여기에 신앙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상하게도 예수님의 삶은 우리가 요구하고 기대하고 바라는 그 삶과 정확히도 반대의 삶을 사셨습니다.
신앙의 연조가 깊어진다는 것은 집사, 권사, 장로가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 요모양 요꼴입니다.” “제가 꽤 괜찮은 신자인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이걸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무엇일까요? 영어 “Humility(겸손)”는 라틴어 humilitas에서 왔는데, 그 뿌리는 humus라는 말로 “흙, 흙먼지”를 뜻합니다. ‘나는 죽은 흙’에 불과한 자입니다. 그걸 깨달은 자들에게서 나오는 것이 겸손이라는 겁니다.
이번 한 주, 작은 겸손의 훈련에 도전해 보길 원합니다.
첫째로, 감사의 영성을 생활화하는 겁니다. ‘당연한 것 하나 없습니다. 주님의 은혜였습니다.’ 이걸 아는 자들에게 어찌 자기 자랑과 불평이 나올 수 있겠습니까?
둘째로, 작지만 의도적은 섬김의 행동을 실천해 보는 겁니다. 남들이 하길 꺼려하는, 눈에 띄지 않는 일들을 기쁨으로 맡아 보는 겁니다.
셋째로, 말에는 각인력이 있고, 흡인력이 있고, 견인력이 있습니다. 언어는 생각을 만들고, 생각은 행동을 만들며, 행동은 문화를 만듭니다. 겸손의 언어가 공동체 안에서 자주 들리고 존중받을 때, 그 공동체는 겸손한 사람을 높이게 되고, 자연스레 겸손이 문화가 됩니다. “겸손은 자신을 작게 여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크게 여기는 것이다.” “겸손은 비교 대신 축복을 선택하는 힘이다.” “겸손은 섬길 수 있을 때가 가장 복된 때임을 아는 것” 등등. 겸손의 성품 언어를 심는 겁니다.
세상은 여전히 자신을 높이고 증명하라고 부추기지만, 하나님의 방식은 겸손입니다. 세상의 방법은 자기 과시와 경쟁이지만, 우리의 주님은 섬김과 자기 비움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제자이기에, 세상의 소리를 거슬러 주님의 발자취를 따라야 합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예루살렘 성이 바벨론에 함락된 후 온 백성이 겪은 비극과 슬픔을 노래한 시입니다. 선지자 예레미야는 나라를 잃은 처절한 현실 속에서 통곡하며 이 책을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심부(3장)에 이르 러 놀랍게도 희망의 노래가 등장합니다.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되는 3장 21절에서 시인의 어조가 절망에서 소망으로 돌변합니다. “기억을 되살리는 가운데 내게 소망이 있사오며” 라는 구절 뒤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가 읽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심으로…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롭도다”입니다.
캄캄한 절망의 한복판에서 시인은 하나님의 성품을 기억해냅니다. 심판 중에도 변함없는 주님의 인자하심과 긍휼을 붙잡을 때, 희미하던 소망의 불씨가 되살아난 것입니다. 예레미야는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의 이유를 오직 하나님의 자비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애 3:22).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신앙이 종종 롤러코스터를 탄 것 같습니다. 아침에는 감사하다가도 오후에는 불평하고, 주일에는 뜨겁게 기도하지만 월요일엔 무기력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신실하십니다. 느낌의 지배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 이것이 참된 신앙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팎에는 화려한 은사와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훌륭한 설교, 감동적인 찬양, 다양한 재능은 교회에 큰 유익을 줍니다. 그러나 교회를 끝까지 지켜주고 세워주는 것은 무엇보다 “신실함”입니다. 세상은 화려한 성공과 재능을 주목하지만, 하나님께서 눈여겨보시는 것은 우리의 신실함입니다. 한 번 반짝였다가 사라지는 일시적 성공보다 일관되게 변함없이 섬기는 그 신실함을 주님은 귀하게 여기십니다.
신실함을 가리켜 흔히 “성품의 근육”이라고 부릅니다. 근육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습니다. 반복되는 훈련과 오랜 인내로 단련될 때 비로소 강한 근육이 형성되지요. 우리가 하나님을 더 깊이 알면 알수록,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하심에 감동될수록, 우리 안에도 하나님을 닮은 성품의 근육이 자라납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우리의 인격이 되어져 가는, 우리 퀸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말과 태도는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는 창입니다. “말과 태도가 복음이 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말 한 마디, 스치는 태도 하나가 곧 복음의 편지가 되어 주변 사람들에게 읽혀진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삶 속에서 사람들은 신자의 사소한 말과 태도를 유심히 지켜봅니다. 에베소서 4장 29절에서는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의 말 한 마디, 표정 하나가 누군가의 마음에 하나님을 전하는 통로라는 겁니다.
성도인 우리의 언행이 부드럽고 은혜로울 때, 사람들은 그 모습을 통해 그리스도를 만나게 됩니다. 그러나 거칠고 날카로운 언어, 높아진 목소리, 저속한 언어들은, 우리 입술로 아무리 복음을 말해도 그 내용을 퇴색시켜버릴 수 있습니다.
야고보서 3장에 의하면 혀는 아주 작은 지체이지만 온 몸을 불살라버릴 만큼 통제가 어려운 존재입니다. “혀를 다스리는 사람은 온 몸도 다스린다”고 하지요. 그러니 내 말부터 훈련하지 않고는 온유한 인격에 이를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온유란 무엇일까요? 흔히 온유라 하면 “온화하고 부드러움” 정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온유의 의미는 그보다 훨씬 깊습니다. 온유는 ‘통제된 강함’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온유한 사람은 강한 힘을 가지고도 함부로 쓰지 않을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힘을 권력으로 휘두르는 것을 강함이라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자기 힘을 죽기까지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용기를 강함이라고 부릅니다. 그야 말로 “성령께 길들여진 강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시편 141편 3절에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켜주소서” 라는 기도가 있습니다.
우리 스스로 혀를 완전히 제어하기 어려우니 하나님께서 파수꾼이 되어 우리의 말문을 지켜달라는 간구입니다. 성령께 우리의 혀의 주도권을 내어 드리고 의지함으로, 우리의 언어와 태도 속에 하나님의 온유하심이 녹아 흐르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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